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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디지털 유산 개념 및 정책

내 데이터가 가족에게 짐이 되는 이유, 디지털 유산의 그림자

1. 디지털 시대의 그림자, 보이지 않는 유산의 등장

현대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며 살아간다. 스마트폰 하나로 이메일을 주고받고, 클라우드에 사진을 백업하고, SNS에 일상을 공유하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결제와 소비를 반복한다. 이렇게 생성되는 수많은 디지털 기록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의 유산으로 축적되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유산’이라 불리는 정보들은 과거처럼 책장이나 금고 속에 정리된 상태가 아니다. 모두 온라인 서버 어딘가에 흩어져 있으며,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대로 남는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전통적인 유산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며, 명확하게 누구의 소유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유산은 그렇지 않다. 블로그, 이메일, 각종 구독 서비스, 클라우드에 남긴 데이터 등은 실체가 없는 만큼 관리도 쉽지 않다. 사용자의 사망 이후에도 삭제되지 않고 남아 있는 정보들은 때로는 유족에게 귀중한 기억이 되기도 하지만, 관리되지 않을 경우 오히려 큰 부담과 짐이 되기도 한다. 즉, 보이지 않는 유산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그림자로 변모하여 유족을 괴롭힌다.

 

2. 계정에 갇힌 고인의 흔적, 유가족의 무력감

사람이 세상을 떠난 이후 남겨진 디지털 계정은 대부분 '잠금 상태'로 남는다. 많은 플랫폼은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의 이유로 사망자의 계정 접근을 제한한다. 예컨대, 구글은 계정 소유자의 명시적인 사전 설정 없이 타인이 접근하거나 삭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글 ‘디지털 유산 관리자’를 설정하지 않은 경우, 유족은 법원의 명령 없이는 계정의 콘텐츠를 열람할 수 없다. 이처럼 사후 계정에 대한 접근은 매우 복잡한 절차를 필요로 하며, 일반인이 이를 처리하기는 쉽지 않다.

페이스북은 추모 계정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지만, 역시 생전에 고인이 설정해놓지 않았다면 절차가 길어지고 복잡해진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카카오톡, 네이버 등의 국내외 플랫폼들도 사망자의 계정에 대해 보수적인 접근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고인이 남긴 SNS 게시물, 채팅 내용, 이메일 등의 정보는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법적 절차 없이는 접근조차 어렵다. 이처럼 유족이 고인의 흔적에 접근할 수 없을 때 느끼는 심리적 무력감은 상당하다. 그들의 삶의 일부가 디지털 공간 어딘가에 남아 있지만, 정작 가족은 그것을 되찾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3. 반복되는 알림과 자동화된 시스템이 만드는 고통

디지털 유산이 문제되는 이유는 단순히 접근 불가능한 계정 때문만은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망자의 흔적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온라인상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생일 알림, ‘2년 전 오늘의 기억’ 같은 SNS의 자동 회상 기능은 고인을 기억하는 유족에게 위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고인의 이름으로 도착하는 자동 메일, 프로필에 달리는 친구들의 댓글,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과거 영상 등은 죽음의 현실을 더욱 잔혹하게 보여준다.

유족은 이러한 반복적인 알림 속에서 일상적인 감정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특히 자주 사용하는 플랫폼에서 고인의 흔적이 노출될 경우, 감정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SNS 플랫폼에서 고인의 계정을 ‘차단’하거나 ‘신고’하는 등의 방식으로 일부러 흔적을 지우려고 시도하지만, 이 역시 완벽한 해결이 되지는 않는다. 고인의 디지털 흔적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유족에게는 감정의 무게를 지닌 또 다른 존재인 셈이다. 그렇기에 그 흔적이 미처 정리되지 않은 채 떠돌게 되면, 애도의 과정마저 방해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4. 법적 공백과 상속의 모호성

디지털 자산의 상속 문제는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정립되지 않았다. 전통적인 유산은 민법에 따라 명확한 상속 절차가 있지만, 디지털 유산은 대부분 ‘무형 자산’으로 분류되어 법적 기준이 애매하다. 예컨대 고인의 유튜브 채널이 매월 수익을 발생시키고 있었다면, 그 수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고인이 사용하던 온라인 쇼핑몰 계정에 남은 포인트, 자동 결제 시스템, 디지털 콘텐츠 구독권 등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명확한 규정이 부재한 상황에서 유족은 디지털 유산과 관련된 수많은 행정 절차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계정 접근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법원에 사망 증명서와 상속인 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 등 복잡하고 비용이 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랫폼 측에서 명확한 정책이 없거나, 지역에 따라 법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공백 속에서 유족은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디지털 공간에 방치된 유산을 그대로 떠안게 된다. 디지털 유산의 법적 모호성은 결국 가족에게 추가적인 짐이 되어 돌아오며, 갈등과 부담을 가중시킨다.

 

5. 생전 정리의 부재가 만든 그림자

모든 문제의 핵심은 고인이 생전에 디지털 자산을 스스로 정리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망 이후의 디지털 자산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메일 계정 하나에만 수천 개의 사이트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계정들도 셀 수 없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고인의 디지털 자산을 제대로 정리하고 관리하는 일은 유족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과제가 된다.

디지털 유산의 정리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의 시대가 되었다. 고인이 생전에 주요 계정 목록을 작성하고, 각 계정의 처리 방향을 정리해 두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가족이 알지 못하는 온라인 지갑이나 가상화폐 계정, 또는 저장되어 있는 개인 문서들까지 포함해 정리의 범위는 매우 넓다. 정리되지 않은 디지털 자산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결국 가족에게 남겨지는 짐이 되어버린다. 사후를 대비한 디지털 유언장 작성, 계정 백업 및 삭제 요청,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비상시 접속 권한을 전달하는 등의 절차는 이제 누구에게나 필요한 ‘디지털 삶의 마무리’라 할 수 있다.

디지털유산의 그림자
디지털 자산의 그림자